뉴스는 세상 소식이고, 일상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예요.
신문을 보면, 나는 내 하루를 잃는다
아침에 신문을 펼치는 순간, 내 하루는 이미 절반쯤 남의 것이 된다.
그날 내가 해야 할 일, 돌봐야 할 사람, 지켜야 할 마음보다 먼저 세상의 소란이 마음을 차지한다. 신문을 본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루의 중심을 세상에 내어주는 선택일 때가 많다.
신문과 뉴스는 본질적으로 ‘긴급함’을 먹고 자란다.
위기, 분노, 갈등, 불안—이런 감정이 강할수록 더 잘 읽히고, 더 오래 기억된다. 문제는 그 대부분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알게 되었지만 바꿀 수는 없고, 공감했지만 책임질 수도 없다. 그 결과는 지식이 아니라 감정의 피로다.
그래서 신문을 많이 보는 날일수록,
정작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심해지고
해야 할 일은 미뤄지며
마음은 괜히 무거워진다.
내 삶의 무게중심이 ‘내 일상’에서 ‘세상 소식’으로 이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안전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뇌는 끊임없이 위험 신호를 받으며 경계 상태에 머문다. 이 상태에서는 깊은 생각도, 평온한 기도도, 성실한 일상도 어렵다. 신문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다고 신문을 전혀 보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보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보느냐’**다.
신문이 하루의 시작이 되면,
나는 세상의 문제를 먼저 떠안고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신문이 하루의 끝에 놓이면,
나는 내 하루를 살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순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또 하나 중요한 기준은 이것이다.
“이 뉴스를 보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있는가?”
없다면, 그 정보는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모든 정보를 내 마음에 들일 필요는 없다. 마음에도 출입문이 필요하다.
삶을 지키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뉴스 다음에는 반드시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짧은 산책, 기도 한 문장, 성경 몇 절, 메모 몇 줄—
이런 작은 회복의 동작이 없으면 뉴스는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아 소음을 낸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신문은 세상의 소식이고
일상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다.
세상의 모든 소식을 다 아는 사람보다,
오늘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는 더 충실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신문을 조심스럽게 본다.
신문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내 하루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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